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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아연 소년들(2017/1991)

by 치킨강정 2022. 3. 26.

최근 나의 관심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에 쏠려있었다. 초반 뉴스를 보니 어린 러시아 병사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침략전쟁에 참전했다는 소식이 눈에 띄었다. 3월의 책은 <아연 소년들>을 읽기로 했다. 원래 알렉시예비치의 글들을 좋아하기도 했고, 러-우 전쟁에 대한 어떤 간접적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연 소년들>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에 참전한 군인, 민간인, 그리고 가족들의 증언을 담고 있다. 젊은 군인들이 아연으로 만든 관에 시신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지어진 제목이다.  

 

이 전쟁에 대한 작가의 의견은 목차에서 아주 강력하게 드러난다(개역개정 기준)

 

1. 첫째 날: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태복음 24:5) 

2. 둘째 날: "다른 이는 비탄에 잠긴 영혼으로 죽어가는데......"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욥기 21:25)

3. 셋째 날: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31) 

 

이 성경 인용은 아래 트윗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알렉시예비치는 아프간 전쟁에 동원된 젊은이들이 국가와 이념 아래 희생되었으며, 전쟁으로 생긴 개인의 고통이 영웅이라는 칭호로 덮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탱크니 장갑수송차니 자동소총 같은 것들은 한시라도 빨리 제자리에 돌려놓고 죄다 덮개를 씌워버렸으면 좋겠어요. 가능한 한 빨리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부 사람을 죽여 없애기 위해 만들어졌으니까요... (중략) 의수나 의족을 찬 아프간 전쟁의 모든 '상이군인들'이 붉은 광장을 행진해 지나가게 하면 더 좋고요.(p. 131)

 

 

소련 정부는 병사들에게 아프간에 공산주의를 전파하고 인민들을 해방시킨다는 목적을 주입시킨 반면, 병사들에게 충분한 물자와 보급을 주지 않았고, 그들의 공훈을 적절히 대우하지 않았다. 소련 정부가 진정으로 청년들의 희생을 고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가 도처에 널려있었다. 알렉시예비치는 전쟁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본인은 젊은이들을 전쟁에 몰아넣고 막상 자신들은 모스크바와 주요 도시에 숨은 지도층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아프간과 소련의 젊은이들, 민간인들이 전쟁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것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에 어째서 거기에 가게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전쟁은 다시 되풀이 될 것이다(러-우 전쟁처럼 말이다).  

 

읽다보니 현재 러-우크라이나 전쟁과 비슷해보이는 면도 다수 발견했다.

 

- 파병을 거부한 병사들은 구타/협박을 받고 끌려가기도 했다.

- 보급이 매우 열악하였으며(다수의 군인들은 메밀로만 된 식량을 배급받았으며, 간식이나 통조림을 사먹기 위해 남녀 가리지 않고 현지인에게 몸이나 무기를 파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80년대인데 50년대에 만들어진 통조림을 지급받기도 했다고. 무기, 장비 역시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 시신은 가족에게 제대로 인도되지 않는다(가족들은 대부분 아연 관을 열어볼 기회도 없었다) 

- 러시아가 '나치'의 손에서 우크라이나를 구원하겠다고 말한 것처럼, 소련은 아프간에 '공산주의와 인민 해방'을 위해 병사를 투입했다. 군인들은 제대하고서야 이것이 사회에 별 의미 없는 전쟁임을 깨달았다. 

 

 

내 아들만 아니면 괜찮다는 식이죠. 우리 나라는 이런 체계에요. 군대에서 한 번 망가뜨리고, 이 사회에서 한 번 더 망가뜨리고, 이 체계에 발을 들이면 톱니에 끼게 되고, 끼자마자 온 몸이 절단나고 말죠. 제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제아무리 가슴속에 뜨거운 꿈을 간직한 사람이라도요. (중략) '중요한 건 이 체계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발을 안 들여놔요?(p. 154)

 

 

결국 책 말미에 보면 알렉시예비치는 아프간 참전 용사 어머니모임과 인터뷰 했던 전직 군인에게 다수의 민사 소송을 당하는데, 이는 소련-벨라루스 정부의 입김이 들어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쟁이 89년에 끝났는데, 91년에 책을 냈으니 굉장히 용감한 행보였다. 일부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들이 영웅으로서 죽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공명정대한 나라에 산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다른 나라, 즉 피비린내 나는 무서운 나라에 살았던 거라고 하는군요. 당신을 용서할 사람이 있을까요? 당신은 우리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어요... 가장 깊은 곳을...(p. 482) 

 

그리고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움직임은 파시스트들과 연결되어 있다. 

 

위대한 강대국과 얼지 않는 바다에 대한 향수는 벨라루스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거느린 지리놉스키 당만의 것은 아니다. 포스트전체주의 사회를 '흔들고', 새로운 피로 '단결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과거에 짓밟힌 이상들을 다시 되찾는 방법인 것이다.(p. 502)

 

 

징병제 국가에 살고 있는 나도 이런 글을 보면 가끔 막막함을 참을 수 없다. 대학교 때 한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군대를 다녀와서 영혼을 다친 것 같다고. 나이가 들고 보니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아야할 20대에 총을 쥐고 누군가를 죽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상처가 안될리 없다. 물론 현재 국방의 의무를 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나 이념 같은 거대한 관념이 개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면, 개인의 삶을 더 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10대 후반, 20대가 얼마나 귀중한 나이인가. 아프간,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청년 모두 귀한 자식 아니겠는가. 

 

전쟁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든 높으신 정책지도자들이 총을 쥐고 직접 싸우길 바란다. 후세에게 좋은 것만 물려줘야하지 않겠는가. 그 허울 좋은 역사적 과제, 의무는 자기 대에서 해결하는게 좋겠다.

 

(이 글은 2022년 3월 26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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