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시간 플레이
<<아래 강력한 스포있습니다>>

내 글들을 읽어온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그렇게 빨리 게임을 플레이하는 편이 아니다. 1년에 많아봐야 최대 4개 정도 엔딩을 보고, 신작을 아예 플레이하지 않는 해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오래된 트친 분이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회사에서 나온 신작을 강추하시는 것이다. 이 분이 이렇게까지 영업을 하시는 분이 아닌데. 페르소나3 리로드 이후에 하는 게임도 딱히 없어서 냉큼 구매해서 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정말 대단한 수작이었다!!
이제 이 게임은 2025 GOTY를 노리고 있고, 나는 이 게임이 수상하리라 확신한다.
게임 플레이 자체는 9월에 끝냈으나 GOTY 발표 이전에는 리뷰를 써야할 것 같아서 이렇게 급하게 타이핑을 해본다.
이 게임이 정말 특별한 부분을 정리하자면
1. 게임만이 줄 수 있는 경험

게임 그래픽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절(20년도 전인 것 같다), 게임 시네마틱 시퀀스/컷씬들이 점점 늘어나면 게임이 유사영화가 되어버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들은 적 있다. 이제는 그래픽 상향평준화의 시대가 열리며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33원정대>는 게임이 유사영화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이 게임이 주는 온전한 경험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다.
먼저 이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세계를 탐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처음부터 파티 리더 캐릭터를 계속 바꿔가며 맵을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왜 이런 쓰잘데기 없는 기능을 넣었는지 의아했는데, 이는 게임사가 우리에게 주는 복선이었다.


게임은 크게 3막으로 나누어 진행되는데, 게임사는 각 막마다 주요 캐릭터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따라서 어떠한 기본 지식도 없이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내가 주인공이라고 믿고 이입했던 캐릭터가 주인공이 아니며, 심지어 주요 조연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같은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점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그 캐릭터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이기적인 캐릭터를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던 캐릭터의 잔혹한 양면을 보며 게이머들은 캐릭터가 다채로운 인간성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게이머는 주요 캐릭터들의 시점에 따라 이 세계관의 초점을 거시사에서 미시사로, 그리고 이것을 다시 거시사로 자연스럽게 전환하게 되는데, 이는 플레이어의 주체적인 몰입이 존재하는 게임이라는 장르에서만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황홀한 전복이었다. 내가 들어간(마치 미엘처럼) 이 세계의 진실을 점점 깨닫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33원정대의 스토리 자체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단순해져 버린다. 플레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 아름다운 깨달음은 게임만이 준다. 아, 글이 부족하여 적절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아쉬울 정도다.
2. 전투가 재미있다!!
기본적으로는 턴제 리듬 액션 전투으로 조금 다크소울 보스전 같은 연출이 있다.
그런데 이 전투... 재밌다! 이 칠까말까 칠까말까하는 패링이 너무 재미있다! 나같이 나이들어 피지컬이 달리는 사람조차도 나중에는 한 번이라도 덜 맞고 더 때리려고 악을 쓰고 패링하게 되는 이 전투가 재밌다!
게다가 뒤로 갈수록 플레이어도 패링이나 회피에 익숙해지고 몬스터의 HP가 늘어나며 좀 지겨운 순간이 오는데, 이때 스킬과 픽토스 선택에 더 자유도를 주면서 반복되는 전투의 지루함을 전략과 통쾌함으로 이겨내게 했다. 게임사가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덕분에 73시간 동안 거의 전투를 스킵하지 않았다.
무기나 스킬을 점점 강한 것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1막때부터 썼던 것들을 업그레이드하며 때에 따라 변경하는 방향인 것도 신선했다. 같은 맥락으로 옷을 장비화하지 않은 것도 정말 신기한 선택이었는데(외양을 바꾸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능이 없다), 이는 설정에도 맞다. 33원정대는 정말로 사지(死地)에 원정을 온 것이라 가지고 있는 자원이 한정적일 것이기 때문에.
또 재밌는 것이 이런 아이템들을 아주 어렵게 루팅하게 하지도 않았다는 점. 길을 가다보면 맵의 지정된 위치에 아주 잘 보이게 놓여있거나 상인에게서 쉽게 살 수 있다. 불필요한 노가다를 안 시키겠다는 의지로 보였는데, 보통 예산이 한정된 게임들이 플레이타임을 늘리려고 렙업노가다를 시키는 걸 생각하면 매우 자신감있는 행보였다.

3. 음악과 그래픽, 모든 것이 그림
https://youtu.be/p00EF6_b5pI?si=8kYQAmLMSMrANM6F
이 게임에 나오는 모든 OST가 좋았다. 가끔 메인 테마를 너무 우리지 않았나? 싶다가도 그것조차 너무 좋았다. 어떨 때는 그냥 아무 조작도 하지 않고 배경음악을 들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한 모든 게이머들이 GOTY 시상식 내 <33원정대>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게임 내의 그래픽, 특히 배경 아트는 정말 압도적인데, 스샷만 찍으면 각도 탓인지 실제로 보는 아름다움의 반도 안 나오는 것 같다. 아니 사진빨이 안 받는 것도 아니고 게임에서 이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4. 프렌치 바이브!
이 게임에는 프랑스 특유의 느낌이 많이 난다. 펜싱이라던지 프랑스의 유명의상 같은 단순한 문화 차용에서 끝나지 않는, 뭔가 프랑스 게임이어서 가능한 이상한 센스들이 있다. 예를 들면






물론 초반 어떠한 정보도 없을 때 프랑스 게임이라서 백인 잔뜩에 아시안 하나, 흑인 하나 이럴까봐 걱정되긴 했다(심지어 포스터에서 다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인종 파악이 쉽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아시안 캐릭터는 하나 나왔지만 흑인은 나오지 않아 이런 나의 편견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5. 오마쥬
여러 게임의 오마쥬가 느껴진다. 젤다와 프롬 게임들, 호라이즌 제로 던, JRPG 등 제작사들이 많은 RPG 게임을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나중에 제작진들의 최애 게임들이 공개되었는데, 그대로 그 오마주를 자신들만의 색으로 녹여냈다. 아래는 내가 느낀 다른 게임들의 영향(더 많겠만 일부만).





6. 애증하게 되는 캐릭터들


여기부터는 그냥 사적인 의견. 이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 대부분은 양면적인 부분이 있고,그 중에서는 플레이어에 따라 납득하지 못할 행동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는 마엘.

나는 이 장면에서 마엘이 이 세계를 자신의 소유물로, 혹은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여긴다고 느꼈, 마엘의 이후 모든 행동을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두 가지 엔딩 중 한 선택지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엘에 이입하며 베르소나 르누아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의견 역시 이해한다. 이런 다차원적인 캐릭터와 사람에 따라 갈리는 캐릭터에 대한 호불호 역시 게임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살짝 아쉬웠던 점
1. 선택과 집중
컨텐츠들이 중간중간 비어있다는 느낌이다. 초반 뤼미에르의 맵은 거의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매우 당황스럽다. 가끔은 "~합니다"하고 진행을 대충 넘겨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동료들과의 상호작용 퀘인데도.






이런 불만은 이 게임이 "인디게임"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 시작되는 것 같다. 이상하다, 분명 이건 AAA급 게임이어야하는데. 인디게임이라는 사실을 되뇌이면 직원이 30명 밖에 안되는 게임사에서 대체 이걸 어떻게 만든 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2. 불친절한 진행

아니 잠깐만, 억울하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나도 RPG를 아주 오랫동안 플레이해 온 게이머인데 픽토스와 루미나의 관계를 뒤늦게 깨달았다. 픽토스를 배워서 스킬에 넣어두기는 했는데, 그 배운 픽토스들을 루미나 설정 창에서 조합해야한다는 사실은 유튜브에서 전투 팁을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다. 아니 내가 헷갈릴 정도면 초보들은 좀 더 헷갈리지 않을까? 좀 더 유저 친화적으로 알려주면 좋지 않았을까?
지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지역지도를 안 내놓을 수는 있다. 그렇게 맵을 빙빙 돌면서 길을 찾는게 올드 게이머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면도 있으니까. 근데 세계지도에는 좀 표시를 해줄 수 있지 않겠니? 저렇게 맵에 오브젝트가 많은데 적어도 내가 클리어한 지역은 <완결> 뭐 이런 표시를 해줘야하는 게 맞지 않나? 내가 어디까지를 어떻게 갔는지 기억 못해서 갔던 맵을 빙빙 도는 게 맞아? 안 그래도 지역이 바뀌면 몹이 리젠되는데? 레벨 노가다를 안 해서 세이브한 게임 시간을 헤매는 데 썼다.
아. 그리고 사이드 스토리가 중요한 곳들이 있는데 만약 특정 맵을 가지 않으면 놓쳐버린다… 중요한 맵이면 표시 좀 해주면 좋겠다. 스크립트로 언급하고 지나가지 말고.

여러 게이머들에게 지적 받았던 세계지도 내 이동 속도의 경우, 후반부에 이 문제가 해결되면서 불만은 좀 덜해졌다. 스토리 진행 상 이동 범위를 제한하는 건 이해하나 기본 속도를 너무 느리게 한 것은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결정이다.
3. 이건 진짜 사소한 것. 초중반 유난히 구스타브 캐릭터의 감정선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오히려 공개된 배우의 모션캡쳐를 보니 배우가 뭘 연기하는지 알겠더라. 모션캡쳐가 따라잡지 못했거나 게임으로 옮겨가면서 감정이 유실된 것 같다. 이런 점은 나중에 회사에 여유가 생기면 세세하게 조정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마이너한 불만 외에 올해의 게임 후보작으로 손색이 없으니, 12월 11일 이후 GOTY 게임 할인을 하게 되면 꼭 사시기를 추천한다. 간만에 게임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게임을 하게 되어서 행복했다.
(이 글은 2025년 12월 3일 작성되었습니다)
+ 2025 GOTY 수상을 축하합니다!
(12월 21일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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